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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14] 無爲堂 李元世 선생(上)
2003년 08월 29일 () 15:03:00 webmaster@mjmedi.com
   
 
육신의 병보다 마음의 치유를 강조
평생 난치병환자 위한 인술 실천


치료를 받으러 온 환자에게 오히려 점심까지 대접하며 마음을 다독이고, 그의 고단한 삶까지 보듬으려 애썼던 무위당 이원세 선생.

지난 2001년 8월 9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던 날에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점심식사 후 담배 한 모금을 피우는 여유를 보일 정도로 그는 누구보다도 스스로를 잘 다스릴 줄 아는 이였다.

한 평생 앞에 나서지 않고 난치병 환자들을 위해 정성을 다했던 그의 일생을 돌아본다.

◆ 無爲堂 그는 누구인가

경북 청도에서 가난한 농사꾼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무위당(1905~2001)은 17세 때까지 四書三經을 공부했다. 이후 20세까지 수업료를 낼 수 없었던 형편이라 이리저리 스승을 찾아다녔다.

어느 날 무위당이 의탁한 집에 당대의 대학자였던 석곡 이규준 선생이 방문했다. 무위당은 심부름을 위해 드나들며 먼 발치에서나마 석곡의 학문 깊음을 알고 한눈에 반해 버렸다.

그래서 틈을 보아 “어디로 가면 선생님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하고 석곡에게 물었더니 석곡 역시 무위당의 천품을 알아보고는 “모월모일 어디로 오너라”했다 한다.

무위당은 기쁜 마음에 이내 당시 대구의 유력자였던 석재 서병오의 집으로 갔다. 석재는 석곡보다 7세 아래로 그의 문하에 들었으나 대구에서는 오히려 석곡보다 석재가 더 유명했다.

천석꾼에 군수를 지냈으며, 서화가이자 재주가 많은 사람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한 인물이었다. 그런 석재도 석곡을 만나 병을 고치자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는 것.

무위당은 석재의 집에 무일푼으로 몸을 의탁하게되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를 해야하는 힘겨운 생활을 시작했다.

석곡이 한달에 두어번 정도 석재의 집에 찾아와 무위당을 부르면 그는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 중에서 두어가지 질문을 골라 묻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것이 당시 그의 학업의 전부였다.

그러나 무위당은 비상한 결심을 하며 오로지 배움에 대한 은근과 끈기로 그 한계를 극복하고 스승의 학맥을 이었다.

그러던 1923년 석곡은 세상을 떠나게되면서 석재에게 무위당을 부탁했다.

이즈음 무위당은 6년7개월 간의 문하생 생활을 마감하고 고향인 청도로 돌아온다. 청도로 온 무위당은 20대 후반의 나이로 한약방을 열게된다.

주위에서는 무위당의 나이와 경험이 적어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이치적으로 병을 다스려 1년 만에 주변에 명의로 소문이 났다.

주위의 연로한 약종상들도 결국 그들 가족의 난치병까지 젊은 무위당에게 진료를 맡김으로써 인정하게 되었다. 이런 명성 덕분이었는지 그는 비록 시골의 한의사였지만 3년 만에 집안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여유도 잠시 주변에서 돈을 좀 번다고 소문이 나자 그의 한약방도 가만두지는 않았다. 일제의 수탈이 갈수록 심해져갔고 그는 마침내 몇몇 사람들과 함께 산으로 피신을 한다.

그러던 와중에 해방이 되자 그는 산에서 내려와 고향에서 이룬 재산들을 모두 둔 채 대구로 옮겨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호에서 이름을 딴 ‘무위당한의원’을 연다.

40대였던 이때에 그가 이룩한 모든 것을 두고 와야만 했던 고향생각에 그만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간경화로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게 된다.

그러다 물질의 덧없음을 깨닫고 정신 수양을 하면서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고, 건강도 회복한다.

대구에서 제2회 한의사시험을 치르고 정식 한의사가 된 무위당은 침을 맞으려는 환자가 너무 많아지자 마음을 다스릴 시간도 자연스레 없어졌다.

그래서 이후에는 침을 놓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또 행여 별다른 질병은 없는데 돈 많은 사람이 단순히 피로회복이나 몸보신을 위해 약을 지으러 올라치면 그 역시도 반기지 않았다.

오히려 “밥 잘 먹는 것이 보약이니 돌아가시오”라며 잘 타일러서 돌려보내기 일쑤였다. 이렇게 그는 늘 물질을 좇기보다는 마음을 다스리는데 치중했다.

그는 오로지 난치병으로 몸과 마음이 고통받는 환자들을 위한 진료에 온힘을 쏟으려 노력했다. 치료비에 연연해 하기 보다는 점심까지 먹여가면서 환자의 고통을 나누려했다.

마음을 열리도록 해야 치료가 될 수 있다는 그만의 믿음 때문이었는지 환자를 그저 환자로서의 존재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한 동반자로서 그를 진심으로 다독이고 보듬으려 했다.

그래서 환자도 하루에 10여명도 채 안되게 받았다한다. 환자 한사람한사람에게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 진료하기 위해서였다.

환자를 적게 보는 대신 질병이 어디서부터 오게됐는지 환자와의 진솔한 대화로 원인을 찾아내고, 환자가 마음의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인생상담을 한 뒤에는 환자 개개인에 맞는 각기 다른 세밀한 처방을 써서 난치병을 완치시킬 수 있도록 했다.

무위당은 같은 증상을 가지고 있는 다른 환자가 온다해서 똑같은 처방을 쓰지는 않았다. 사람이 각기 다 다른데 어떻게 그 사람들 모두에게 같은 약을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증상이 같을 지는 몰라도 병의 원인이 다 다르므로 같은 약을 쓰더라도 병이 낫는 사람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병은 정신 즉 마음에서부터 오는 것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허리를 약간만 잘못 움직여도 디스크가 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실제로 허리가 약해서 오는 디스크와는 달리 심리적인 불안초조증세가 원인이라고 보았다. 정신적인 불균형이 결국 온 몸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이치다.

대구에서의 생활에 마음의 안정을 느끼고 익숙해져 갈 무렵 무위당의 막내아들이 위암으로 고생하다 사망하게 되자 아들도 못 고치는 사람이 어떻게 한의사를 하겠느냐며 고통스러워했다.

설상가상으로 비슷한 시기였던 1985년 여름에는 평생을 남달리 금슬이 좋아 주위로부터 부러움을 샀던 부인이 그만 뜻하지않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됐다.

깊은 슬픔과 실의에 빠진 무위당은 대구에서 운영하던 한의원 문을 닫고 큰 아들이 살고 있는 부산으로 가게된다. 1985년(80세)의 일이다. <계속>

강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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