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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16] 松齋 李鍾馨(上)
2003년 11월 28일 () 14:01:00 webmaster@mjmedi.com
   
 
전통과 현대를 이은 晴崗의 수제자
교육시스템 체계 구축에 이바지


한의사의 서가라면 한권쯤 꽂혀있을 법한 晴崗醫鑑(1984·성보사 刊)은 고종 시절 내원 소속 동제의학교 교수를 역임했던 청강 김영훈 선생의 처방을 담은 것으로 晴崗의 수제자인 松齋 李鍾馨(74) 선생이 정리한 것이다.

청강 선생은 과거질서가 허물어지고 새시대로 재편되는 근현대에 한의학 계승의 주역으로 평가되고 있는 인물이다.

이종형 선생은 경희대, 대전대, 동국대에서 교수로 재직했고, 대한한의학회 이사장·대한한의사협회 대의원총회의장·대한내과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국제동양의학회 이사 및 세계침구학술대회 학술 위원장 등으로도 활동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과거 교육과 한의사의 권익을 위해 투신했던 스승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 청강 선생과의 인연

이종형 선생의 고향은 황해도 평산군. 선비 출신으로 땅을 일구며 살던 집안에서 그는 어린시절 훈장이었던 조부에게서 한문을 배웠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근방의 한약방에 심부름을 갔던 소년의 예절바르고 영특한 모습을 보고 한약방 주부가 한의학을 배울 생각이 없냐고 권유했다.

다음해 부친이 사망하자, 6남매의 생계는 홀어머니의 몫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고 또한 자신의 인생을 찾는 길은 한의사가 되는 길이라 다짐했다. 형님이 쥐어주는 3백원, 그리고 그 주부가 자신의 스승이라며 찾아가 보라고 적어준 소개장을 쥐고 홀로 월남해 만난 것이 바로 청강 김영훈 선생이었다.

처음부터 이종형 선생이 순탄하게 청강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3년간 한의원에서 이종형 선생의 일이란 것은 궂은 허드렛일 뿐이었다.

하루는 용기를 내어 가르침을 청하자 스승은 하루 진료를 끝마친 저녁에 그를 불러냈다. 그가 내민 것은 빨간잉크로 일일이 토씨를 단 의학입문이라는 책이었다.

이날부터 저녁에 스승이 몇 페이지씩 읽어주면, 그는 다음날 한의원에서 틈틈이 외우고 저녁에 스승 앞에서 암송해야했다. 이렇게 해서 의학입문을 한달 안에 떼자 스승은 “너는 되겠구나”라고 말했다.

당시 김영훈 선생에게는 제자를 자청하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스승의 이 말은 수많은 사람 중에 이종형선생이 의지와 총명함을 인정받아 정식 제자가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청강 선생의 수업방식은 저녁에 스승이 선창하는 내용을 다음날까지 완벽히 외우게 한다. 그래야만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이런식으로 황제내경, 동의수세보원 등을 배워갔다. 낮에는 스승의 곁에 붙어앉아 진료하는 모습을 보고, 스승이 적어내린 처방을 한약방에 직접 전달했다. 이때 그는 자신이 머릿속에 처방한 내용과 스승의 것을 비교해 보고, 틀린 것은 저녁에 스승에게 물어가며 학문을 높여갔다.

이종형 교수는 “의학입문은 한의학의 가이드라인이고, 동의수세보원은 백화점입니다. 백화점에 찾고자 하는 물건이 어디있는가 잘 알 수 있는 요령은 가이드라인을 알고 나면 손쉽게 파악 할 수 있는 것처럼 동의수세보원이라는 백화점의 안내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의학입문”이라면서 “이것이 바로 한의학을 공부하는 요령”이라고 말했다.

그는 “서른살 쯤 되었을 때 차츰 내 처방이 스승의 처방과 똑같아지는 것을 확인하면서 학문에 대한 체계도, 자신감도 생기더군요”라고 회고했다.

◆ 한의학의 체계를 잡기 위해

그는 스승의 권유로 동양의약대학(현 경희대 한의대)에 입학했다. 한의원과 학교를 오가며 학업에 정진한 그는 1955년 한의사 국시에서 수석합격해 면허증을 취득했다. 그리고 8년뒤 34세(1963년)에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 보인한의원을 개원했다.

치료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환자도 늘어만 갔다. 개원 8년 뒤 경희대에서 한방병원을 설립하게 되자, 이종형 선생은 교수직 제의를 받게 됐다. 그는 “한의학의 임상내용·교육시스템의 체계화가 필요한 시기” 라는 판단에 따라 학교행을 결심했다.

그리고 이듬해(1972) 경희대 한방병원 제3내과과장으로서 임상교수의 생활이 시작됐다. 이미 개원의 시절부터 대한한의학회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교육문제에 고민했던 그에게 대학병원의 임상교수 자리는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병원생활이 그의 이러한 의지와 맞아떨어지지 못했다. 의료시스템과 학술의 발전보다는 경영수지에 우선가치를 뒀던 병원생리는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다.

그는 “교수들은 임상연구보다 다른교수들과 환자수를 놓고 경쟁하고 반목하게 됐다. 당장의 이익에 급급해 그러한 시스템을 만든 병원에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렇다고 배움에 목마른 학생들을 외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편 그는 한의학의 체계화를 추진해 나갔다.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한의학에 무지한 대중의 인식이었고, 보건당국자들 또한 그를 절망케 했다며 일화 한토막을 들려준다.

그는 학회 관계자로서 한의대 교과목으로 병리학을 개설하기 위해 보사부(현 보건복지부)를 찾아갔다. 그런데 해당과의 담당자들은 ‘한의학에 병리학이 어디있냐’고 일언지하에 무시해 버렸다고 한다.

“세포며 바이러스로 가득차 있는 그네들에게 8강을 기본으로 한 한의학의 병리학은 학문적 가치가 없다고 평가됐지요. 하도 분통이 터져 내가 왜 이 학문을 했나하는 후회가 막심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꾹참고 수차례 찾아가 설득한 끝에 결국 병리학은 교과목으로 인정됐다고 한다. <계속>

오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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