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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4] 청강 김영훈 선생(上) - 생애
2003년 04월 18일 () 15:05:00 webmaster@mjmedi.com
일제에 맞선 한의학 부흥운동에 헌신

상황판단능력 비상, 한의사모임 결성 주도

근세 100년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이 단절된, 변화와 굴곡의 삶 자체였다. 한의학도 민족의 운명과 같은 궤적을 그리며 힘겨운 역사를 이어왔다.

청강 김영훈 선생은 한의학 중심의 조선의 의료체계가 서양의료 중심의 의료체계로 바뀌던 1900년 초부터 일제, 미군정, 6.25까지 50여 년을 온몸으로 한의학 수호와 부흥에 헌신해온 한의학의 화신이었다.

선생이 활동하던 1900년대 초의 의료지형은 우리나라 의료체계가 서구식 의료체계로 개편되는 시기였다.

청강선생이 탄생한 시기도 바야흐로 한의학이 위기를 맞던 시점이었다. 1882년 고종 19년 강화도 온수리에서 태어난 선생은 향리의 한학자들로부터 漢學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신학문을 배우지 않으면 입신출세가 막히는 시대라는 특징과 신문화를 거부하는 주위 어른들의 만류로 갈등을 겪던 중 15세 되던 해에 우연히 눈병을 앓게 되면서 인천의 徐道淳이라는 명의에게 치료받고 나았다. 이를 계기로 선생은 동의약에 이끌려 80년간의 한의학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동제의학교 都교수 되다

한의학 공부가 어느 정도 무르익어갈 무렵이던 1904년 한의학을 살려야 한다면서 궁중의 典醫 洪哲普 張容駿 등이 고종에게 주청하여 설립한 내의원 직속 同濟醫學校에서 동의학을 가르칠 교수를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응시하여 50대 1의 경쟁을 뚫고 都敎授로 선발되었다.

청강은 이 학교가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폐위되면서 함께 폐교될 때까지 3년을 봉직하는 동안 내의원의 전의들과 교분을 나누고, 명문대가들을 치료하면서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선생은 普春의원을 개설(1909년 봄) 하였다.

동제의학교 도교수 생활 속에서 다져진 친분과 보춘의원을 운영해서 얻은 경제력은 이후 한의학 부흥운동의 두터운 밑거름이 된다.

끊임없는 한의조직체 건설

일제의 서양의학 중심 의료체제가 완성되어감에 따라 한일합병 직전의 한의학은 거의 빈사상태에 이르렀다. 이에 청강선생을 비롯한 8명의 명망있는 동의학도가 1909년 3월 結盟을 맺었는데 이것이 八家一志同盟이다. 이때 동맹서는 “…散亦同散하고 合亦同合하야…不願同日同時生이로되 但願同日同時死焉”이라고 적어 매우 비장한 각오를 드러냈다.

八家一志同盟은 전국 동의들의 조직체를 결성하기로 계획하고 취지문을 전국에 돌린 끝에 1910년 10월 드디어 ‘大韓醫士總合所’를 창립하게 된 것이다. 선생은 이 조직의 총무로서 전국 동의에게 동의학을 연수시키는 한편 서양의술을 섭렵하기 위해 연찬회를 개최하는 등 백방으로 뛰었다. 서양의학에 대한 선생의 해박한 지식은 3년간에 걸친 연찬회에서 얻어졌다.

합방후 신분이 醫生으로 격하된 침체된 분위기에서도 동의학을 일으켜보자는 열정을 버리지 않았다. 1915년 박람회 개최를 이용해서 全國醫生大會를 개최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 결의된 것이 첫째, 全鮮醫會의 결성, 둘째, 會館 購入, 셋째, 교육기관 설립, 넷째, 학회지의 발행이었다. 이 결의는 하나의 조직을 이루는 데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서 대부분 실현되었다. 全鮮醫會의 설립(1916년 해산)은 물론이고 학술지인 ‘東醫報鑑’를 발간하고 그후에도 동서의학보로 개명하여 10여 호를 속간하였다.

3.1운동 이후에는 동서의학연구회 회장직을 맡기도 하고, 1933년에는 동의학진흥대회의 결과로 창간된 월간학술지인 ‘東洋醫藥’의 발간 책임을 맡았다. 이때 편집주간은 ‘통속한의학원론’의 저자로 유명한 조헌영(시인 조지훈의 부친)에게 위촉, 한의학 대중화의 불길을 지폈다.

1913년 의생령이 공포된 이래 5,800여명이 등록했으나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반수가 사망하거나 자격이 취소되어 숫자가 감소되고, 그나마 남은 의생마저 고령화되어 학문전수가 위태롭게 되자 대책을 모색하던 중 경기도 일원에 無醫面 문제로 고심하는 경기도당국의 고충을 간파하고 ‘의생을 양성해야 한다’는 논거로 수차에 걸친 접촉 끝에 1937년 4월 경기도립 의생강습소가 설립되는 일이 있었다.

한의학 교육의 산파역할 수행

이때 선생은 강사진에 참여하여 진료가 끝나면 강습소에 나가 강단에 섰을 뿐만 아니라 비용까지 출연하는 수고를 치러야 했지만 후진을 양성한다는 보람에 힘든 줄을 몰랐다.

그런 노력 덕분에 경기도 의생회가 창설될 수 있었다. 강사진과 강습소 출신 東醫들이 주체가 된 것이다. 선생은 경기도의생회 회장에 추대되어 해방공간에서 숨쉴 기반을 마련하였다.

선생의 탁월한 지도력은 해방후 대한의사회가 만들어졌을 때 회장에 다시 추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의 재임시절 경희대 한의과대학의 전신인 東洋醫學專門學院을 개설하여 오늘날 한의학 교육의 산파역할을 했다.

선생은 1946년 9월 대한의사회총회에서 고령으로 회장직을 사임한 뒤로도 후진양성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당시 황해도 평산에서 월남하여 선생집에 기거하면서 한의학을 공부하던 18세의 학생 李鍾馨(현재 72세·동국대 한의대 교수 정년퇴임)은 당시 선생의 모습을 이렇게 회고한다.

“청강선생은 70의 노령에도 종로구 묘동 자택에서 노량진역 근처에 있던 동양의학전문학원까지 전철로 출퇴근을 하였지요. 칠판에 판서를 해가면서 강의하는 선생을 생각하면 참 대단한 열정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은 진료보다 제자 교육에 더 관심을 기울였어요. 청강 선생댁은 조선의사회의 회담장소였고 선생이 없이는 모임이 되질 않았어요. 경력·학식·재력 어느 모로 보나 동의계의 중심이었지요.”

1952년 국민의료법이 제정되면서 탄생한 대한한의사협회는 선생의 이런 공적을 인정하여 명예회장에 추증되었다. 한의계 처음으로 건국국민포장도 받았다.
선생은 1974년 7월26일 성북동 자택에서 93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조선 5천년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동안 가장 많은 변화가 일었던 20세기 초반 50년. 선생의 지극한 한의학 사랑에 오늘날 한의사제도의 뿌리가 있다고 생각하니 콧등이 시큰해진다.

김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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