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하 著 양철북 刊

“원장님도 고민이라는 게 있습니까?”

사업실패와 인생역경을 한참 쏟아내던 환자는 상담도중 내게 질문을 던진다. 그의 눈엔 내가 고민하나 없는, 베르톨트 브레히트 시에 나오는 행복한 자로 보였음에 틀림없다(물론 나는 세속적인 면에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이상은 서쪽에, 현실은 동쪽에 있다는 것’이 고민이라는 내 대답에 그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찬다. 그는 도리어 내게 처방을 내린다. 고구마 농장에서 새벽 4시부터 저녁까지 고구마 캐는 작업에 참여할 것. 그러다보면 ‘호강에 겨워 하게 되는 그런 따위의 잡생각’은 눈녹듯 사라질 것이라며 ‘너무나 나약해빠진 원장님’에게 딱인 체험이 될 것이란다. 고구마 농장은 자신이 알선해 줄테니 걱정마라고 그는 아침부터 목소리를 높인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작가란, 삶의 많은 시간을 술마시는데 할애하기 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유폐시켜 세상과 이상 사이에서의 갈등과 고뇌를 글로 승화시키는데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스님은, 깨달음을 위해 값진 세속체험을 등질만큼 강렬했던 구원의 열망을 품고 치열하게 정진하는 사람이다. 사실, 일상 자체만큼 핍진한 것이 또 있을까마는 그 핍진성마저 포기하고 구원을 향해 오롯하게 수행하는 자가 수도자 아니겠는가. 그러나 현실에서는 가승들이 판을 친다. 내가 꿈꾸는 인간은, 순간의 일상을 겪어내면서도 전체적인 삶을 고뇌하고 조망해내는 자이다. 나 역시 결여와 부족함 투성이지만, 인간이라면 삶에서 무언가 ‘끈’을 잡아채, 그 끈을 계속 붙들고 나아가야하지 않을까.

일상에서 무수히 마주치는 사람들은 부평초처럼 삶의 표면에서 부유한다. 그들은 자신의 결여를 ‘인식 결여’한채 하루살이처럼 살아갈 뿐이다.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하루는 또 그저 그렇게 죽어간다. 오로지 생계벌이에 몰두할 뿐이다. 고독할 수 있는 자유의 기쁨과 가치를 아는 자가 드물다. 자신의 진정한 결핍에 대한 앎을 결핍한 자들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마음나눌 이를 찾기 어렵다. 다시, 높고 쓸쓸하냐 낮고 무난하냐의 문제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잡을 끈조차 없는 이들의 결핍에 연민을 가져야한다.

낮아서 그저 그런 사람들로 득시글거리는 세상에서 높아서 쓸쓸한 사람의 아름다운 성장 기록을 소개한다. 한라산 필화사건으로 1987년 구속된 이산하 시인이 자전적 성장 소설을 써냈다(1987년 이 사건 담당검사는 흥미롭게도 황교안 현 대통령 권한대행이다.). 우리는 이 짧은 기록에서 참된 인간, 참된 수행자, 참된 작가의 모습을 전부 만나게 된다. 이산하 시인 자신이 지은 소년기 이름이 양철북인데, 소년 양철북과 법운 스님의 특별한 만남은 가슴시리도록 아름답다.

나이 50에 뒤늦게 비구니가 된 외할머니가 주지로 있는 암자에 방학마다 머무르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철북 앞에 어느 날, 카바레 제비처럼 백구두를 신은 법운 스님이 등장한다. 법운 스님은 스님의 틀에 구애받지 않는, 조르바처럼 자유로운 영혼이다. 그럼에도 그 누구보다 맹렬히 수도한다. 모기가 굶어죽는 것을 원치 않아 모기떼에게 새까맣게 온 몸을 피빨리면서 몇날 몇일을 묵언 수행하는 스님이 안타까워 스님의 영양보충을 위해 산으로 산딸기를 따러 다니는 철북이의 아름다운 마음은 세월이 흘러 작가 이산하의 것 그대로이다. 법운 스님의 면벽 수행이 드디어 끝나고, 철북이와 스님의 여행이 시작된다. 문학에 뜻을 품은 총명하고 순수한 소년과 깨달음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찬 맑고 고결한 스님의 여정은 읽는 내내 가슴 찡하다. 삶의 슬픔을 알아버렸다는 점에서 닮은 두 사람은 마치 임꺽정과 병해대사처럼 산천 곳곳을 다닌다. 법운 스님은 철북에게 도처의 수도자들을 보여주고, 둘은 문학과 구도, 삶과 인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종국엔 서로 깊이 이해하게 된다.

여행이 끝나고 스님은 구도의 길로, 철북은 작가의 길로 각자의 꿈을 안고 헤어진다. 스님은 철북에게 발우를 남기고 그 길로 혈사경 정진에 입한다. 철북 역시, 세상에 침묵하고 방관하는 자들의 의식을 두드리는 영혼의 양철북이 되어 펜으로 그 북을 힘껏 치라는 스님의 가르침대로 치열한 작가의 길로 접어든다. 이후 이산하 시인의 삶은 ‘절대고독의 중심에 우뚝 선 자, 그가 곧 수도자요, 작가’라는 법운 스님의 마지막 가르침으로써 오래 견디는 세월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야한다. 변화는 항상 파괴 뒤에 온다.」 이는 이산하 시인 자신이 작가, 진정한 인간, 삶의 구도자로서 평생 온 몸으로 해온 작업이었던 것이다. 정신이 낮아 육신은 평안하지만 그저 그렇게 하루 하루를 죽여 없애는 보통의 사람들이 이산하 시인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총명하고 순수한 한 소년이 어떤 글보다도 아름답고 감동적인 ‘삶’이라는 작품을 만들어낸 시인이자 구도자로 성장(그리고 성공)하는 것을 목격하며 독자는 깊은 울림과 깨우침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은 이에게라면, 앞선 환자의 잘못된 고구마 처방에 대해서도 나는 할 말이 더 생긴다. 하루 동안의 고된 농장 노동보다 내게 필요한 건, 내가 가진 틀을 깨부수는 것, 내 세계를 깨트리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일상에서 매순간 하는 고뇌와 갈등자체가 바로 그 깨트리는 작업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런 고뇌의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내 안에서 날개가 돋아나리란 것도. 타인이 달아주는 거짓 날개가 아닌 스스로의 날개는 내게 명방이 되어 어느 날, 내가 지극한 완전함의 기쁨을 누리게 되리란 것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값 1만1000원)

한의사 윤희정 / 광주 광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