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상 著 산지니출판사 刊

써야할 서평을 앞두고 늦은 밤 책을 편다. 머리를 이리저리 궁굴리다 책마다에 깃든 시간과 사연을 곱씹는다. 책과 대면하며 젖어드는 감상은 독서가의 특권이자 낭만이다. 높이 쌓인 책들만큼 관념도 비대해졌다. 책사보느라 돈을 참 많이도 썼구나. 그만큼 벌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이 모든 작가들의 자식이다. 타인의 삶에 대한 독자로 출발해, 내 삶의 저자로 충실히 살고 있는가. 수많은 밤 작가들의 독서를 표절하며 나는 얼마만큼 왔는가. 삶에 도통한 자여, 말해다오.

한 때 장정일처럼 정곡을 찌르며, 군더더기 없는 짧지만 강렬한, 그 자체로 너무도 완벽하여 더 이상 반론 따위가 불가능한 글을 쓰고 싶었다. 독자의 머리를 꽝 울려 당장 그 책을 사보지않고 못견디는 서평을 쓰고자했다. 내가 성공했는지 알지못한다. 의도치않게 소개책에 대한 관심을 넘어 내 개인에 대한 관심을 야기한 것은 사실인듯하다. 눈뜨자마자 울리는 전화너머로 “도대체 J가 누구인가?”, 혹은 “책은 주로 언제 읽나?”, “책을 낼 예정인가?”, “서평에 대한 평을 하고 싶은데 차 한잔 할 수 있겠는가?” 라는 물음들로 가끔 당혹스럽다.

내 차창 밖으로 새어나간 생상스의 하바네즈를 계기로 내게 다가온 한 남성은 책과 음악을 (그의 표현에 의하면 광적으로) 좋아하여, 자신의 사무실이 온통 책과 음반으로 뒤덮인 사실을 몹시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그렇게도 자랑스러워하는 그 많은 책들을 꼼꼼히 읽었는지 궁금할 뿐이다. 우연한 첫 만남 이후 내 팬을 자처하며 그는 상당히 나를 성가시게 했는데, 몇일 전 그가 연락을 했다. 그간의 내 연락 회피를 원망하며 도대체 자기가 이 나이에 어디가서 나처럼 젊은 여자와 문학 이야기를 할 수 있겠냐고, 자신의 전화를 부디 끊지 말아달라 간곡히 부탁하는 것이었다. 

젊은 여자. 심심찮게 듣는 말이다. 새삼 우리 사회에, 이 땅의 남성들에게 고질적으로 내재된 남성중심주의를 떠드느니 내 입만 아프다. 젊은 여자랑 문학과 시, 음악 이야기를 하는데서 말할 수 없는 행복감과 성취감을 느끼는 특정 연령대의 한국 남자들의 독특한 낭만을 탓하고 싶진않다. 세상의 잘못은 내가 해결하기에 이미 거대하니까. ‘젊은 여자가 아닌 인간으로서 문학을 하고 있다. 죄송하지만 바빠서 시간내기 쉽지 않다.’라고 답하는 내가 전화를 끊을까 그는 조바심내며, 요새 내가 무슨 책을 읽는지 알고싶다고 한다. ‘조갑상의 「밤의 눈」을 읽습니다.’ 공손하게 대답하고 젊은 여자는 전화를 끊었다. 

평론가 이명원은 한 컬럼에서 문학적 지성을 문제제기한 오길영 평론가를 소개하며 문학계에서 지성의 결핍을 심각하게 지적한다. 지성의 결여는 주관의 과잉을 초래해 결국 나르시시즘을 야기하고 마는데, 따라서 지성은 소설가의 글쓰기에서 객관화의 중요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명원의 글과, 그가 소개한 오길영의 문학적 지성에 대한 평론을 찾아 읽다가 문득, 소설가와 평론가, 문학의 세계에서만 지성의 결여가 문제 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에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성의 결여로 주관주의의 과잉에 빠져있는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채, 자기만의 정서와 습성에 묻혀 자아도취적 자의식에 갇혀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명원은 바로 지성이 주관주의의 유혹을 차단하는 열쇠라고 말한다. 무례함을 넘어 타인의 삶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는 나르시시즘은 완전한 지성의 추구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도 완전한 지성을 목표로 삼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한 지성을 완전하게 하는 것, 오로지 이것에서만 인간의 지복이 성립한다고 스피노자는 강조한다. 정확성이 결여된 지식, 진정한 앎(오길영은 이를 추상적 섬세함과 구분지어 구체적 섬세함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곧 지성이다.)이 없는 지식주의는 자폐적 제자리걸음만을 이끌어 개인을 파국에 이르게한다. 

그러나 오길영의 설명에 기대어 평론이 언제나 소수적이듯, 지성도 소수적이다. 진정한 문학은 원래부터가 군중에게서 멀었고, 다수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소설가 배수아의 신념처럼, 정상적인 문학은 늘 소수의 영역이었다. 지성도 마찬가지다. (스스로에 의해)선택받은 소수만이 오랜 시간 수련을 거쳐야하는 지성의 길을 걷는다. 눈치빠른 이는, 지식의 종류나 물리적 양이 아닌 자각과 앎, 사유의 질적 깊이와 정확성에 대한 내 관심을 알아챘으리라. 정확하고 섬세한 사유로 이어지지않는 책읽기는 돈과 시간 허비일 따름이다. 앎의 방편은 다양하다. 그럼에도 올바르고 진지한 독서가 앎의 가장 명확한 방법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린 앞선 이들의 생애와 사유를 표절한 작가들을 또 한 번 표절하며 한층 명료하고 깊어진 사유 위에서 비로소 내 삶의 진정한 저자로 거듭날 수 있다. 헌신적인 독서가만이 표절의 특권을 누린다. 물론, 표절의 목표는 새로운 삶의 창조다. 선대의 인류는 후대의 ‘스스로 선택당한’ 인류를 ‘예상표절’하며 일찍이 잠들어있다. 이처럼 죽은자, 산자를 아우르며 우리는 서로가 우주 안에서 끈끈하게 연결되어있다. 단, 연결되고자 하는 자에 한해서. 창조를 꿈꾸며 표절하고자 하는 자에 한해서.

앞의 남성이 젊은 여자의 책읽기를 들여다보며 올바른 지성의 길로 접어들면 좋겠다. 그가 너무 오랜 시간 헤매지 않았으면 한다. 긴 방황을 하기에 인생은 무척 짧다. 다시 은총이 필요한 이유이다. 소설가 조갑상이 표절하고, 후대 작가들을 예상표절한 선대 작가들의 은총이 부디 그 남성에게도 내리길 기도한다. 「밤의 눈」을 다 읽은 젊은 여자는 조용히 책을 덮는다. 밤이 물러간 책 위로 아침이 내린다. 그리고 서평없는 서평도 탄생한다.

한의사 윤희정 / 광주 광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