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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은 나의 삶25·上] 한송 정우열
2004년 04월 23일 () 14:01:00 webmaster@mjmedi.com
   
 
한의학 해석에 철학사상 도입

화창한 봄날을 뒤로하고 도심 속에서 발길을 재촉하는 이끌림이 있었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 아파트 상가건물 2층에 위치한 한송한의원.
여타의 한의원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곳이지만 이곳에서 한의계 인생 제2막을 열어가는 사람이 있다.
지난해 대학강단에서 25년 간의 강의를 끝으로 정년퇴임한 한송 정우열(66) 선생은 한의계 인생 40여 년을 지내며 그동안 품어왔던 꿈을 이루기 위해 이곳에서 새로운 도전장을 내밀었다.

■ 위협받는 정체성

한의계에 첫발을 내딛은 지 올해로 40주년을 맞는 정우열 선생은 “그동안 한의학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많은 설움을 받아왔다”며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했다.
또 “요즘 세태를 보면 한편으론 한의학의 정체성이 변화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움도 있지만 많은 우수한 젊은 인재들이 한의계에 들어오고 있어 (한의계의)미래에 대해선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이라고 했다.

선생은 최근 한의학은 홍보적인 면에선 한의학을 널리 알리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긍정적인 면이 있으나 자칫 환자를 유혹하려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업적인 면도 보여 정체성에 있어서는 위험한 측면도 있다고 했다.

그는 일례로 “최근 한의계에서는 한의학 육성법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아왔고, 고무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한의학의 정체성이 보호되지 않고 유행이나 상술적으로 활용된다면 위태로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와 함께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정부로부터 프로젝트를 받았을 때 대부분 서양의학을 잣대로 한 미비된 과학으로 평가를 받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자칫 우리의 한의학이 가지고 있는 장점들이 잘려나갈 수 있다고 했다. 우리 스스로 잘 지켜나가려는 노력이 없으면 좋은 법을 만들어 놓고서도 왜곡된 잣대로 변형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정우열 선생은 무엇이든 조심스럽게 접근하지 않으면 나무를 안고 불로 들어가는 격이 될 수 있으므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한의사들 스스로가 명심해야 할 것이라는 당부다.

그는 요즘 ‘신약개발’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에 대해 이런 말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에 따르면 신약개발이란 말은 한약을 가지고 신약을 만든다는 뜻인데 분석학적인 접근으로 약을 개발한다는 것은 양의학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의학은 신약개발이 아닌 신 처방 개발의 개념임을 강조했다. 즉 병을 좇아 지엽적인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예술가가 하나의 예술을 창조하는 입장에 있는 것처럼 한의학도 1차적으로는 환자라는 대상을 놓고 정확히 파악해서 증상에 맞는 처방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렵다면 선현한의사들이 연구해 놓은 기존의 처방 중에서 환자에게 맞는 처방을 골라내는 ‘選方’의 노력이라도 있어야하고, 이런 노력조차 없이 환자를 봐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 한학의 채취속에서 자라

선생은 1938년 2월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학교에 입학하기전까지 당시 마을에서 이름난 훈장이었던 조부밑에서 천자문을 공부하며 자연스럽게 전통한문학을 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어릴적부터 한학의 채취를 느끼고 자란 탓에 국문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하지만 막상 뜻대로 되질 않았다. 당초 지망했던 서울대 국문학과에선 떨어지고, 대신 연대 국문학과엔 합격했으나 순수한글 위주의 수업방식이 그에게 맞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에 입학을 포기했다.

대입관문에서 좌절되자 그는 고이 간직해 온 꿈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듯 했다. 낙담속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당시 상과에 재학중이던 가까운 친구가 학교를 자퇴하고, 함께 동양의약대학(현 경희대 한의대) 한의과에 갈 것을 권유해 왔다. 서양과학이 풍미하던 시대적 배경때문에 한의학은 한낮 미신이나 비과학쯤으로 폄하되던 때였다.

그러나 선생은 한의학이 평소 생각해오던 ‘우리 것’이면서 국문학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는 생각에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그는 이때를 어떻게 보면 우연인 것 같으면서도 필연적 운명인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이렇게 들어간 그의 대학시절은 1959년 자유당 말기로 정치적으로 어수선한 시절이었다.

그는 혼란스럽던 시절 김장헌(상한론)·권영준(침구학)·안병국(내과학)·채인식(상한론) 선생 등은 당시 한의학의 학문적 지주로서 한국 전통의학의 마지막 보루와도 같은 존재였다고 회상했다.

정우열 선생은 특히 당시 기초학분야에서 생리학이론에 밝은 현곡 윤길영선생과 실사구시적인 관을 가지고 병리학을 강의했던 두산 한세정 선생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 두산의 영향으로 병리학 연구

이중 두산 선생은 정우열 선생이 지금의 병리학을 연구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같은 병이라도 병이 변화하는 과정에 따라 치료방법도 달라진다는 ‘기화의학’을 강조했다고 한다.

정우열 선생은 당시엔 4년제이던 한의대 2학년때 ‘동의보감’을 접하게 되면서 맨 앞에 나오는 ‘身形臟腑圖’라는 그림을 보고는 한낱 유치한 그림으로 간주해버렸고, 精·氣·神이라는 말과 道家·佛家, 儒家·墨家에 대한 내용이 자주 나왔는데 의서에 왜 이런 내용들이 많이 나오는지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의구심을 푸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는 대학졸업후에 의학서적이지만 한의학에서는 철학사상을 통해 설명하고 있으며, 동의보감을 엮어낸 철학사상의 맥락을 읽어내지 못하고는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선생은 한의대에 들어가면서 접한 ‘동의보감’에서 허준을 만난 뒤 지금까지도 그의 연구 대부분을 ‘동의보감’과 허준 의학사상이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선생의 호인 ‘漢松’은 생활불교운동이 한창이던 70년대 즈음 그가 다니던 절인 용화사의 田强 스님이 ‘이 세상에서 참된 진리와 참된 나를 깨우치라’는 뜻으로 지어준 법호 라고 한다.
그래서 한의원 이름이나 제자들의 모임인 ‘한송회’도 모두 선생의 법호에서 따온 것이다. <계속>

강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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